윤이상 尹伊桑
1917년 9월 17일 태어남 / 1995년 11월 3일 죽음


윤이상
"작곡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아는 존재이다. 인간의 고통과 억압과 불의,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사유 대상이 된다. 고통이 있는 곳, 불의가 있는 곳에서 나는 음악으로 발언한다."

- 윤이상

윤이상은 음악을 통해 한반도 분단의 갈등을 화해시키고자 애쓴 민족음악인이며, 서양과 동양의 음악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 세계적 음악인이다. 그는 17세 때 일본에 유학해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1943년 무장독립운동을 하려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고, 8·15해방 후에는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했고, 1953년에는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 이즈음 가곡실내악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56년에는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파리 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957년 8월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으며 1965년에는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1967년 한국 중앙정보부동베를린 간첩단사건과 관련하여 그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귀국시켰고, 재판 결과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고 동료 음악가·교수 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71년 독일국적을 취득했으며, 뮌헨 올림픽 대회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오페라 <심청>을 초연했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한국에서 열린 윤이상음악축제에 참석하려 했지만, 한국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한겨레>에서 윤이상 통일음악회 관련 기사를 제공한다. 디지털 법보에서 작곡가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읽을 수 있다.

[독일어 사이트]
국제윤이상협회에서 윤이상에 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한다. Musik in der edition text + kritik에서 독일어판 <작곡가 윤이상 Der Komponist Isang Yun>의 서평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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